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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김영하

DidISay 2014. 10. 23. 18:20

 

 

김영하의 소설을 리뷰한 적이 있었나 싶은데...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즐겨 듣고, 소설 역시 대부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건 이 작가의 소설에 대한 감탄이라기 보다는 우연에 가깝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난 그의 소설에 대한 호감보다

그의 목소리와 팟캐스트 대한 애정이 더 높았을 것이다.

 

이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가독성이 좋고 빠르게 읽힌다는 것

그리고 매회 소설의 아이디어가 매우 좋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같은 초기작부터

최근의 '살인자의 기억법'까지 제목을 빼내는 솜씨도 그렇고

플롯을 구성하는 기획력 역시 대중들의 흥미를 잘 끌어낼만하기 때문에

순수작가와 대중작가로서의 선을 영리하게 잘 넘나든다는 느낌이다.

 

김훈 작가가 화려하고 만연체의 진중한 남성성을 매력으로 내세운다면

김영하 작가는 매우 담백하고 깔끔한 문체인데,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더 눈에 잘 들어온다.

 

이 책 역시 퇴근 후에 1시간 정도를 투자해서 휘리릭 읽어내려갔는데

이전작 보다는 더 재밌게 읽었고, 좀더 좋았다.

제목은 아멜리 노통브의 '살인자의 건강법'에서 따온듯한 느낌.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한 연쇄살인범이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로 땅을 가득 채운 대숲을 구입했고 그곳을 매일 유유히 산책하는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일흔살 노인.

어찌보면 연쇄살인범들의 이상적인 노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는 어떤 계기로 인해 2,30년 전 살인을 중단했고,

지금은 수의사로 일하던 직업에서도 은퇴하고 전원생활을 하는 중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그에게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감도 없고 불안감도 없다.

그는 자신의 자존감을 구성하는 일종의 법칙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살해한 가족의 딸인 은희를 거둬다 키우고 있고

자신이 죽었을 때를 대비해 거액의 보험금 역시 마련해둘 정도로 애정을 쏟고 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평온한 일상에 하나둘씩 문제가 생기는데

첫번째는 주인공이 치매에 걸려서 점점 기억을 잃어가게 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새로운 연쇄살인범이 그의 딸 은희를 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매력은 주인공의 양면성에서 나온다.

동물을 살리는 수의사와 사람들을 죽이는 연쇄살인범

가족을 죽인 원수와 딸을 거둬 키워준 보호자

과거의 기억만 남게 되는 나약한 노인과 딸을 지켜야 하는 아버지

 

킬링과 힐링이 한 글자 차이인 것처럼,

이 양극단을 가볍게 널을 뛰듯 오가는 주인공 때문에

소설의 흡입력은 매우 높아진다.

 

 

 

하지만 소설의 결론으로 갈 무렵 독자들은 점점 불안감에 휩싸이는데

그가 생각하고 있던 세계가 사실은 모두 거짓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마치 장자의 꿈 속 나비처럼

꿈을 깨면 사라지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생각했던 스스로의 모습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자신이 갖추고 있던 세계가 하나하나 조각나서 무너지는 순간.

마치 허언증 환자가 진실을 깨닫게 될 때 이런 느낌일까.

 

어쩌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無의 상태인.

과거의 작은 기억만 남게 되는 알츠하이머의 세계가

그에게는 더 행복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ㄷ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