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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가는 생각

밥상머리 이야기 6. 고마워.

DidISay 2012. 7. 5. 03:25

 

 

 

보통 자취생의 음식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건 라면이다. 그 다음 순위는 햇반정도가 될까.
요즘은 닭이나 사골 육수를 이용한 라면이나 다이어트라면 등 제법 고급화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시 가장 맛있는건 기본의 매콤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이 어우러지는 그런 라면들이다.

요즘은 라면 가격도 많이 올라서 천원 남짓의 가격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라면은 소박하고 값싸며 손쉽게 한끼를 때울 수 있는 서민적인 음식이다.

동시에 귀차니즘에 찌든 이 땅의 수많은 자취생들에게 고칼로리를 선사하는
영원한 동반자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내 자취생활에서 라면은 그다지 기억에 남는 음식이 아니다.
평소에 밥이나 반찬이 떨어지는 경우도 거의 드문데다가 라면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아서,
라면은 어디까지나 그저 가끔 먹는 '별미'에 가까웠지 절대 '주식'의 자리를 차지하진 못했고,
때문에 라면을 박스째 사다놓는다거나 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먹고 싶을 때 한두개 집어오는 정도.

그런데 내가 이 밤에 뜬금 없이 떠올린 기억 하나는 바로 짜파게티이다.

내겐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내가 사귄 남자친구들이 대부분 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가장 인간으로서 존경할만하고 마음이 예쁜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나를 위해 서있을 것 같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훌쩍 큰 키 만큼이나 마음도 넉넉해, 언제나 참 다사로웠다.

어느 연말 열이 40도 가까이 올라서 이틀 내내 거의 일어나지도 못하고 죽을 지경이었을 때
만사 제치고 달려와서 잠도 못자고 이마에 물수건을 짚어주던 것도 그였고,
시험 기간이면 아르바이트와 학점 사이에 치여서 부담과 절망감에 울고 싶었던 나를 
항상 말 없이 손을 잡아주고 매 끼를 챙겨주면서 위로해준 것도 그 사람이었다.

3년의 연애 기간 동안 변함 없는 마음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받아온 나는 어쩌면 참 행운아이다.
한 사람을 변함없이 꾸준히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시간이 꽤 많이 지난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고백하건데 나는 아마 그렇게 헌신적인 태도를 결코 타인에게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난 보통의 경우 그 누군가보다는 내가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아주 드물게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할 때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였지
3년의 세월 동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다니던 학교 인근의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내가 살던 곳과 거리는 좀 있었지만, 역시 신촌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처음 그의 집에 갔을 때 난 집 부엌에 냄비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보통의 남자 자취생들처럼 그 역시 대부분의 끼니는 학교나 일반 식당에서 때우고 있었고,
음식 쓰레기나 설거지가 귀찮아 라면조차 컵라면만 먹는 삶을 살고 있었다.

결국 필요 없다는 그의 말을 무시해가면서 젓가락 한벌과 냄비를 억지로 쥐어줬는데,
이 재료로 처음 대접 받았던 요리가 바로 짜파게티였다.

보통은 내가 그에게 차려줬던 요리를 자기도 보답하고 싶다며 뭐를 먹고싶냐고 묻길래
도대체 뭘 만들 수 있냐고 물었는데 그 중 가장 자신있다고 대답한 것이 바로 짜파게티였다.

난 짜파게티를 거의 먹질 않아서 도대체 이걸 어떻게 잘 끓인다는거야 라며 궁금해했는데
어쨌든 그 의아함 속에서도 난 작은 상 앞에 앉아 처음 그에게 식사대접받는 기분을 느껴보려 애썼다.

아 그런데 그가 만들어온 짜파게티는 정말 좀 남달랐다.
신경쓴 구석이라곤 위에 겉들인 오이채 정도였지만,
어디서 구한건지 고춧가루와 함께 달달 볶은 짜파게티는 꼬들한 면이 그대로 살아있어서 참 맛있었다.


그때의 그 맛이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만든 음식을 먹었다는 뿌듯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그 라면이 맛있게 조리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그는 항상 먹지 않고 한참이나 그 모습을 지켜봤는데,
그때의 심정은 엄마의 것이었을까. 연인의 것이었을까.

어찌되었든 그 때 난 오랜만에 엄마의 정을 느낀 것 같아 참 좋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뒤로도 종종 짜파게티를 요리해달라며 졸랐던 것 같다.
그가 다른 요리도 이제 할 수 있다며 자신만만해 했지만 언제나 나의 1순위는 짜파게티였다.

그 당시 그 시간만큼은, 타향생활이 외롭게 느껴지지도
아침점심저녁의 스케쥴이 모두 꽉 차 있었던, 그 당시 생활이 고단하게 느껴지지도 않았기에.

 

 

 


그래서 짜파게티는 나에게 고마움의 음식이다.

혈육이 아닌 타인에게 엄마의 정을 느끼던 순간.
누군가가 내 고단함을 이해하던 다독임의 시간.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항상 그자리에 변함 없이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준 시간.

 

이제야 이 글을 빌려, 그때의 그에게 말해본다.

고마워.
말로는 쑥스러워서 하지 못했지만.
정말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