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소리내어 책 읽기 (295)
언제나 날씨는 맑음
제목은 수도없이 들어봤지만 제목의 모호함 때문인지 선뜻 읽지못하다가 이제야 읽게되었다. 장편소설인 줄 알고있었는데 알고보니 1994년 프랑스 작가들 일곱 명의 단편 중에 로맹 가리의 가 포함되어 출간된 것. 개인적으로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그 분위기가 우선 마음을 끌었고 읽는 내내 마치 영화와 같은 시선의 이동이 인상적이었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가 이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던데.. 정말 비슷한 느낌이다..^^ 스토리는..음 조금 애매한 면이 있어서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나올 것 같다..하긴 이게 문학의 즐거움이겠지만.. 스토리에서 아..하고 충격을 느꼈던 건 '류트'와 '가짜'였다. 우리네의 소시민적 의식을 하나하나 적나라하게 하지만 위트있게 묘사하고 있어서 굉장히 좋았다.. 마..
요즘 '적의 화장법'을 연극으로 연출한 작품이 인기를 끌면서 책까지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혐오감을 주지만 놀라운 반전이 그 매력인 듯한데 개인적으로는 연극보다는 책이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난 사실 이 작가의 책을 '오후 네시'란 책을 통해 처음 접했었는데 그 시니컬한 면에 반해서 그후로도 종종 서점에서 눈에 띌때마다 집어들곤 했다. 이번에 다시 보게된 책은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이다. 이 글을 읽다보면 '시몬느 보봐르'의 책이 생각나는데 그녀의 유명한 저서'제2의성'보다는 어릴적부터 성인이 될때까지의 자서전적인 내용이 담긴 그 외의 책과 비슷한 느낌이다. 당돌하면서도 당찬..뭔가 독특한 사고방식.. 세상을 향해 일반적인 생각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냉소적이지만 한걸음 밖에서 보다 통..
인간 정신을 연구하는 이들이 더러 인용하는 사례 중에 테레사 수녀의 꿈 이야기가 있다. “천사의 손에 쥐어진 황금빛 창의 단단한 끝이 불타고 있었다. 그가 긴 창으로 내 가슴을 몇 차례 찔렀고 끝내 나의 내장을 뚫었다. 그가 창을 뽑았을 때 나는 창자가 모두 달려나오는 듯했고 마침내 신의 사랑에 온몸이 타버렸다. 나는 고통스러워 신음했지만 고통은 끝없는 감미로움을 가져왔고 ….” 20세기 숭고함의 표본인 테레사 수녀는 이 꿈을 종교적 신성 체험이라고 말했지만 정신분석의들은 그것이 다만 억압된 리비도의 표출이라고 해석한다. 마찬가지로 테레사 수녀의 지극한 이타심에 대해서도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의심해 보는 건 나의 외람된 생각이다. 옥스퍼드대 출신의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1970년대 중반..
분노의 포도는 스토우 부인의 '엉클 톰스 캐빈'과 더불어 사회 고발적인 성향으로 인해 발표 후 미국의 큰 반향을 일으키며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물론 이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이 이 작품이 아니라 'The Winter Of Our Discontet'라는 다른 작품을 통해서라는 것이 좀 의아하긴 하지만... 이 작품의 배경은 미국의 경제 공항과 모래바람으로 인한 농경의 피해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나도 모래바람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심각하길래 농경을 망칠 정도인가 라고 생각하고 이 작품을 주로 경제공항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이 당시 피해는 엄청나서 모래바람이 한번 불고나면 마치 사막지대처럼 일부 지형이 변경되었을 정도라고 한다. 대자본의 영입으로 인한 농경의 기계화와 ..
이 책의 제목을 들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니 그럴수 밖에 없는데.. 하지만 '반딧불이의 무덤'이라는 애니메이션의 이름은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표작이기도한 이 애니메이션의 원작은 바로 War tale for children 즉 전쟁동화집의 작가인 노사카 아키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반딧불이의 무덤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사실 2차대전의 가장 큰 피해자를 일본인인 것처럼 그렸다고해서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잔잔한 감동이 있는 작품인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책 역시 전쟁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사실 노사카 아키유키의 모든 작품은 전쟁과 관련이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은 몇년전에 여행을 가기 전에 차안에서 읽으려고 서점에서 급히 산 책이다. 어제 신정이라 그런지 잠이 오지않아 책장을 뒤지다가 발견해서 다시 꼼꼼하게 읽게되었다. 비둘기집이란 대한민국최초로 1980년대에 발행된 가족신문의 이름이다. 편집자인 두 형제가 초등학생때부터 대학생에 이르는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매월 꾸준히 발행된 것이 이 책한권에 묶여져 있다. 소박한 가족의 미. 요즘 사라져가고있는 대가족제의 그리움,, 그리고 1980년대에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대들.. 그 모든 것이 이 책한권에 욕심없이 소박하게 담겨져있다 초등학생이지만 뛰어난 글과 논리정연한 생각에 놀랐던 책이다. 편집자가 커가면서 변화하는 생각의 깊이나 사고의 방향등도 눈여겨본다면 흥미로울 듯.. 2005신정을 맞이하는 새벽.. 이..
오랫만에 만화책을 읽다가 눈에 띄는 구절이 있어 끄적여본다.. '인간이란 약한 존재거든..기적을 바라는건 당연하지.. 하지만 인간이기에..거짓을 부정할 수도 있는 거다..' '스승님! 스승님은 인간에게 있어 필요한 것이 뭐라 생각하세요?' '글쎄다..구원이 아닐까?' '핫하..그럴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전 이런 생각이 들어요..인간에게 꼭 필요한 건.... 하늘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떳떳함이 아닐까..' 비록 그것이 추악한 진실일지라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인간만이 지닌 삶의 태도일듯..
우리는 흔히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악독하고 표독스러운 계모의 이미지를 상상하곤 한다 여기에서 항상 아버지는 무능하고 혹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존재이며 계모는 아이들 위에 군림한다. 타인의 아이들은 재혼으로 결합된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기존작품과는 다리게 일방적인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또한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특이하게 생각했던 것은 어머니를 일찍 여읜 인물을 한없이 가련하고 연약한 존재로 그리지 않고 일정측면 거리를 두고 부정적으로 보았고 또 주변 인물간의 갈등을 보여주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친모를 그리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나 친모와 계모 사이에 끼어있는 아이들을 다루고 있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은..
펄 벅의 대지를 다 읽었다. 대지는 작가가 중국에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농민들의 가뭄과 일상생활, 풍습, 가치관 등을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3부로 이루어져있고, 1부는 왕룽의 이야기 2부는 왕룽의 아들의 이야기 3부는 왕룽의 손자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어제 단숨에 1부를 다 읽었는데 초반에 나타난 왕룽의 순수함과 투박함이 나에게 계속 웃음을 짓게 하였다, 하지만 점점 세속적으로 변해가는 왕룽의 모습과 오란의 죽음 그리고 세아들과 왕룽 간의 가치관의 갈등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였다. 마치 한국소설 삼대를 생각나게 하는 이 작품은 중국 역사의 흐름과 연관되어 각 세대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 최고의 방송진행자인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자전적 이야기. 다른 아이들의 수업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 토토(데츠코)는 결국 전철 여섯 칸으로 된 도모에 학교로 전학가게 된다. 그곳은 누구도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이 스스로 인식하며 행동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학습자 중심의 열린 교육을 실천하는 곳이었다. 굳이 교육에 관심이 많지 않더라도 소박하고 아름다운 삽화가 눈에 띄고 또한 교장선생님과 토토 주위의 사람들의 교육관과 아동에 대한 배려 아이들의 천진난만함등이 복합적으로 감동을 선사한다. 고등학교 때 이 책과 후속편들을 보고 참 많이 울었었던..
1949년 시몬느 드 보봐르 작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라고 주장하여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실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이 현대에 와서야 정착된 것이고 21세기인 현재에도 계속 진행되고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는 단계인데 49년도에 저런 생각을 가진 여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저서로 거침없이 표현하였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사르트르의 동반자이기도 했던 그녀는 평생 사르트르, 시몬느 베이유 등의 지식인들과 생각을 공유하였다 그 심도깊은 사색과 학문의 결과가 그녀의 저서마다 배어있는데 제2의 성은 그녀의 저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에 속한다 현재 페미니즘에서는 고전으로 취급되지만 10년전만해도 페미니즘계열에서 이 저서를 빼고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 정도..
그저께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소나기가 쏟아졌다. 집까지 10분정도 걸리는 거리라 잠깐 책이나 볼까하고 카푸치노를 사서 도서대여점에 들어갔다 내 눈에 들어온 책은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 미망(未忘)이었다. 내가 가진 미망의 기억은 어릴적 엄마가 즐겨보시던 드라마에서 시작된다 당시 홍리나와 채시라가 나왔던 그 드라마는 어릴적이지만 꽤나 인기가 많았던 작품으로 기억된다.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 속에서 항상 등장하는 소재를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을까하는 마치 퍼즐을 맞추는 기분으로 미망을 빌려서 왔다. 서서히 읽어내려가면서 역시 개성상인, 송도, 근엄하지만 손녀를 귀엽게 여기는 할아버지, 정갈한 삶의 모습, 싱아 등 낯익은 소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한국 근현대사..
...만약 어떤 사람이 1919년에 서울을 방문하여 큰길로만 다녔거나 전차만 타고 다녔으면, 아마 서울도 극동의 여느 도시들처럼 부분적으로 서구화된 지저분하고 재미없는 도시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단 대로를 벗어나서 들어선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관광객에게 새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갑자기 등장하여 놀라게 하는 멋진 한국 사람들... 내가 훗날 한국을 다시 찾더라도 이 멋진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면 좋겠다. ...그레서 나는 그림을 그리기 전 먼저 풍경을 들이마셨다. 아니 들이마신다는 말은 충분하지 않다. 나는 그 안에서 멱을 감았다. 나는 그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가 아예 풍경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 그 느낌을 종이 위에 재구성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뒤따랐다. 약속시간보다 좀 일찍 ..
겁이 났어요. 명우 씨한테 노은림이라는 여자는 혹시 먼 불빛이 아닐까 하고, 먼 불빛이라 아련하고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 아닐까 하고, 한계령 가서 생각했어요. 나도 불쌍한데, 그 여자만 불쌍한 게 아니라 나도 불쌍한데, 다만 난 불쌍해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어쩌면 사랑을 한다는 일이, 산다는 일이 사실은 훨씬 더 삼류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실은 삼류소설 속에 구질구질한 삶의 실체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겨운 진실들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일류 소설처럼 정제되고 억제되고 그리고 구성이 뚜렷하여 인과 관계가 확실한 한 편의 드라마는 아닌 것이다. 사랑을 해 보지 않고 상처를 받지 않는 것보다 사랑을 해 보고 상처도 입는 편이 훨씬 더 좋다는 어떤 작가의 글을 읽었다. ..
나는 여권신장론의 투사는 물론 아니며, 여성의 권리나 의무에 대하여 아무런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옛날 내가 '계집아이'라고 정의되는 것을 거부했듯이 나는 현재 자기를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나였기 때문이다. ... 내가 누군가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느낀 건 내 인생에 있어 처음 있던 일이었어요. ... 사람이 지내는 순간을 통일하는 방법엔 여러가지가 있다. 가령 하나의 행동에 각 순간을 종속시킨다든가, 하나의 작품에 그것을 쏟아넣는다든가, 나의 경우는 내가 계획한 사업은 나의 생에 그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손에 그것을 꽉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두 개의 요구, 즉 행복할 것과, 세계를 나의 것으로 만들 것, 이것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낙천적인 나는..
내 생각에 한 사람의 개성이란, 각각의 사소한 차이점들의 조합일 것 같아. 그러니까 A란 사람은 단발머리+커다란 엉덩이+란제리 팬티+은희경 소설+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들+중앙일보 사설+위장병...등등이라면, B란 사람은 염색한 갈색의 긴 머리+유난히 작은 유방+컬러 팬티+신경숙 소설+왕가위의 영화들+동아일보 사설+근육질...등등인 거지. 이러한 조합은 거의 무한에 가까우므로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미세하게나마 서로 다른 사람인거야 바로 그거야. 그렇게 각자의 차이점이 고작 몇몇 유행의 조합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 배우자를 선택할 때 가장 중시되는 것은 돈이지. 우리나라 같은 경제 구조에서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은 돈이니까. 같은 값이면 돈 많은 상대를 택하지 않겠어? 돈 많은 신부감을 원해? 아니 그럼? 돈 ..
나는 '혼불'을 쓸 때, 저무는 동짓달 눈 내릴 듯 흐린 날씨의 적막함을 그리고자 문을 열고 공기를 사흘 동안이나 노려본 적이 있었다. 첫날은 버슬버슬 먼지같이 나와서는 겉돌던 창문 바깥 허공이, 둘째 날은 차분히 가라앉더니, 드디어 셋째 날 공기의 속갈피 속에서 정령 같은 푸른빛이 저절로 돋아나 이내처럼 일렁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 공기은 나의 정수리로 밀밀하게 흘러들어와 감기었다. 나는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사물의 본질에 숨어 있는 넋의 비밀들이 늘 그리웠다. 그리고 이 비밀들이 서로 필연적인 관계로 작용하여 어우러지는 현상을 언어의 현미경과 망원경을 통하여 섬세하게 복원해 보고 싶었다. 이 중에서도 나는 무엇보다 '느낌'을 복원해 보고 싶었다. 느낌이란 추상적이고 소모적인 것이어서 불필요하다고..
어떤 위대한 시인이 말하기를 사랑은 눈을 통해 들어온다고 했단다. 그러니까 암만 많이 보고 싶어도 이 세상을 너무 많이 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 이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아름다우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Ironweed) 中, 윌리엄 케네시-
한동안 참 많이 읽었었던,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들. 그야 아직 우리는 젊었고, 인생의 마지막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난생 처음으로 여러 가지 드라마를 보았다. 사람과 사람이 깊이 관여하여 보게 되는, 다양한 사건들의 축적을 확인하면서,하나하나 알아가면서 4년을 쌓아갔다. 지금은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다. 하느님 바보. 나는 히토시를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달빛 그림자 그래.내가 할 수 있는 일있으면 말해, 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다만, 이렇게 밝고 따스한 장소에서, 서로 마주하고 뜨겁고 맛있는 차를 마셨다는 기억의 빛나는 인상이 다소나마 그를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언어란 언제나 너무 노골적이라서, 그런 희미한 빛의 소중함을 모두 지워버린다. -만월 中- 가끔,..
나는 연애하고 싶다. 남자에게 심각한 얼굴로 헤어지자고 한 뒤 술을 마시고 싶다. 같이 자자고 요구하는 남자에게 눈물만으로도 사랑을 확인해달라며 폼잡고 싶다. 누구든 애태우고 싶다. 누구도 내 환심을 사려 들지 않을 뿐더러 나 때문에 마음 졸이지 않는다. 나는 하찮은 존재다. 나는 소박만 맞는다. 그이는 이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일조차 없다. 어떤 때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렇게 안 쳐다보고 살 걸 남자들은 왜 이렇게 예쁜 여자와 결혼하려고 안달인지 몰라.나는 이제 얼굴을 밀어버리고 그냥 남들과 구별만 가게 '마누라'라고 써붙이고 있을게 라고. 분명히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사랑을 이루고 나니 이렇게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는 화려한 비탄이라도 있지만, 이..
대화,강상훈,2008 십수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친구 둘과 술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는데 술이 좀 오르자 두 친구 중 한 명이 내게 몹시 상처 되는 말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친구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다음 날, 멀쩡한 정신으로 친구들을 다시 만났을 때 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친구 하나도 치부를 건드리는 심한 말을 들었다는데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희한한 건 그 친구도 내가 상처 되는 말을 들은 것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날 밤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그 자리에서 나온 말들이 결코 범상치 않은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로지 각자가 들은 이야기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날의 가벼운 술기운만으로는 ..
그가 전화를 해주었으면, 하고 기다릴 때가 있다. 나의 코끼리 이야기를 이해해주고 귀 기울이는 사람은 그밖에 없으니까. 나는 수화기를 붙잡고 코끼리 얘기만 갖고도 한 시간쯤은 수다를 떨 수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래도 보이는 게 있다. 이따금씩 집이 꿈틀, 움직일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아, 코끼리가 왔구나, 짐짓 생각하는 것이다. 방금 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땐 그냥 무덤덤하더라.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토록 설움이 북받치는 것이지. 나무를 베는 일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아주 계획직인 일입니다. 우리들은 돌아오는 겨울이나 새 봄에 죽어야 할 나무들을 골라 동력 톱으로 껍질을 벗겨놓습니다. 미리 표시를 해두는 거지요. 멀리서 보면 표시를 해둔 나..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하루키의 글 중 하나. 아마 가장 널리 알려진 하루키의 글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동화적인 앞부분이 아닌, 씁쓸함이 느껴지는 후반부이다. 처음 이 글을 책으로 읽었을 때는 도입부분을 참 좋아했던 것 같은데... 100%의 완벽함이란 있을 수 없는 사람에게, 100%의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느낌만으로도 온전히 나를 충족시키는 그 혹은 그녀. 나 같은 경우는 좀 역설적이긴 하지만, '가끔은 바보가 되는 사람'이 100%의 남자아이일 것 같다.내가 그러하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어,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지 않습니까"로 끝나는 말을 건낸다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다.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하라주쿠의 뒤안길에서 나는 1..
낭만적 사랑에서는 서로의 차이점이나 갈등의 요인들이 간과되고 축소된다. 낭만적 사랑의 관점에서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 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차이점이나 갈등이 있다 해도 소소한 것이거나 소소한 것이어야 한다. 그 결과는? 갈등이 커질수록 상대방이 진정한 영혼의 짝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되며 결국 관계는 깨지게 된다. 합류적 사랑이란, 기든스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타자에게 열어 보이는 것"이다. 즉, 서로 다른 정체성을 인정하고 사랑의 유대를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이루어 가는 것이 합류적 사랑이다. 동물원은 '주체'와 '타자'와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사랑했던 우리. 나의 너, 너의 나,나의 나, 너의 너. 항상 그렇게 넷이서 만났지. 사랑했던 우리. 서로의 눈빛에 비춰진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