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소리내어 책 읽기 (295)
언제나 날씨는 맑음
조해진님의 소설에는, 세상 한 귀퉁이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 없이 외롭지만,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하는 사람. 말이 없고 고요한 시선들. 자신의 삶에 몰입하지도,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지도 못하는 완벽한 타자. 그래서일까. 얇고 빳빳한 책장을 넘기는 내내, 낮고 건조한 목소리를 가진 익명의 화자가 내 눈을 빌려 책을 읽어내려 가는 듯한 환청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건조함에 질려 문장을 급하게 치워버리려 할 때, 언제나 그 목소리는 나를 다시 붙잡아 호흡을 고르게 해줬다. 사실 '천사들의 도시'를 작년에 구매하려고 했지만, 절판된 상태라 보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재출간 되었다는 소식에 다급하게 마우스를 움직여 구매버튼을 눌렀다. 한달음에 읽겠다고 두근거렸던 시간들...
책을 읽을 때 애용하는 우리집 한구석. 두툼한 가죽좌식의자에 앉아서 읽으면, 어쩐지 소파보다 집중이 잘 된다. 날이 추워져서 수족냉증者인 나는 카펫을 이번주부터 깔기 시작. 생일선물로 코타츠를 받아야하나 고민 중이다. 의자 뒤에 있는건 내가 집에서 주로 입는 두툼한 스웨터. 똑같이 두툼한 슬리퍼. 귤 세개. 녹차 조금. 그리고 아이패드로 틀어놓은 팟캐스트 음악방송. 사실 오늘 원더우먼 페스티벌과 조이올팍페스티벌. 초대권 받은 곳이 두군데나 있었는데 일정이 어그러져서 포기하고 페이퍼 작성 뒤에 하루종일 독서모드 :D 오늘 내가 읽은 책은 연애소설 시리즈. 얼마만에 읽은 독일소설. 그것도 로맨틱한 내용인지 모르겠네. 예전에 이 책이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고 앞부분을 조금 읽었다가 한번에 쭉 읽어내려가야 할 소..
2007년에 나온 정이현의 단편소설집. 단편소설집의 제목은 보통 그 책에 실린 작품 중 하나를 따서 짓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오늘의 거짓말'은 단순히 '수록작품의 타이틀 중 일부'보다는 좀더 큰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 소설 속 모든 사람들은 기만과 위선, 허구와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과거에도. 오늘도. 미래에도 계속해서 그 거짓말들을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니 꽤 심각한 소설같은 인상을 주게 되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읽는 내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이 떠올랐는데, 정이현 작가의 인터뷰를 보니 습작 초기부터 존 차버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의 영향을 많이 읽었고 '도시인들의 부스러진 일상을 다루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의 거짓..
1910-2001년을 살아간 아버지의 삶을 그린 그래픽 노블. 안토니오 알타비라가 양로원에서 자살한 자신의 아버지를, 부친의 입장에서 1인칭으로 써내려간 글을 킴이 만화로 그려 완성된 책이다. 나온지 얼마 안되는 신간인데, 꽤 재밌어서 편 그자리에 쭉쭉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역사적인 사실들과 개인사가 뒤섞여있고, 그림체도 선이 굵고 묵직한 편이라 마치 시대극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아주 올바르다거나 올곧다고는 말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삶이지만, 부정적인 모습까지 가감없이 그렸다는 것이 놀라웠고 나름대로 타락하고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수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좋았다. 지금도 천국과 같은 상태는 아니지만, 적어도 저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새삼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고 해야하나. 스페..
1. 2000년대 초반에 가족들과 놀러갔을 때 일이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조명이나 냉난방을 비롯한 각종 설비들을 모두 리모컨으로 작동하게 되어있었는데 설명서 없이 리모컨만 처음 마주한 우리 가족은 순간 당황했다. 꽤 시간이 흐르고 짜증과 몇번의 실패를 거친 후 겨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신제품들을 다루지 못해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잠시 느꼈던 것 같다. 2. 엄마가 해주셨던 이야기인데, 친할머니가 컴퓨터를 굉장히 열심히 배우시길래 왜 그렇게 힘들게 하시냐고 물어보셨단다.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주 기본적인 것도 못하게 된다고, 당신의 시할머니께서 전화도 사용하지 못하는 걸 보셨다고 대답하셨단다. 그래 그 ..
이번 추석에 마포김사장으로 유명한 북스피어에서 알라딘과 함께 이벤트를 했는데, 연휴기간 동안 '그림자 밟기' 독서퀴즈를 다 맞춘 사람에게 책구매비용을 알라딘 적립금으로 돌려주는 것! 그 소식을 듣고 바로 알라딘에서 미리 책을 구매해놨다! 덕분에 추석연휴 동안 하루를 카페에서 빈둥거리면서 책 읽기에 몰두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받은.ㅎ 책을 다 읽고 퀴즈를 푼 결과 만점을 받았는데, 정말 책 앞부터 뒤까지를 꼼꼼하게 읽어야 풀 수 있는 문제들이라 꽤 재밌었다. 다음 연휴에도 이런 이벤트가 종종 있다면 좋겠다라고 잠시 생각하게 된 :D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주로 '화차' '이유' 같은 사회파 미스터리를 봤었는데, '그림자 밟기'는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 미스터리'물에 속한다. 때문에 등장하는 풍습이나..
이 작품 속에는 스키야키부터 소양(Tripe)만두, 심지어 유통기한 지난 음식까지 가지각색의 식품들이 등장한다. 기본적으로 식食은 의衣나 주宙보다 훨씬 더 생존과 직결되어 있으며, 사회문화적 위치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트뤼플과 캐비어를 즐기는 이와 음식물쓰레기통을 뒤적이는 사람의 처지는 분명히 다를 수 밖에 없다. 이 작품 속 먹을거리들은 혀와 눈을 만족시켜주는 기호식품이 아닌 오히려 자신의 빈곤을 깨닫게하고, 독자들의 식욕을 뚝뚝 떨어지게 만드는 그런 존재들이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작가인 배수아 씨가 밝히고 있듯이 일정기간 동안 몰입을 해 쓴 것이 아닌, 여러 작품들을 써내려가는 동안 잊을만 하면 그 다음 장을 쓰고...또 한참 뒤에 다음 장을 쓰고.. 하는 방식으로 완성한 책이다. 때..
일단 이 글은 스포일러 없는 감상기이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설국열차'는 제작초기부터 꽤 화제가 됐었는데, 개봉 후 원작과의 접점이 거의 없다는 소식이 들려서 좀 의아했다. 만화가 원작인 작품들은 대부분 영상화하기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일텐데 왜 원작에 거칠게 손을 댔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약판매로 원작을 먼저 보고, 그 뒤에 영화를 보러가기로 했는데 이 만화를 읽으면서 왜 각색을 많이 거쳤을지 한번에 이해가 갔다. 이 작품은 크게 3개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다. 중편정도 규모의 만화 3개가 별다른 접점 없이 독립된 이야기에 가깝게 구성되다고 보면 된다. 아마 1편의 작가였던 자크로브의 사망으로 2,3편에는 작가가 바뀌는 바람에 이렇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 '-' 이야기의 흐름..
예술가. 라고 하면 천재적인 영감을 받아 순식간에 몰입하는 모습이 떠오르지만,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작가는 그런 천재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만약 게으름뱅이 천재와 성실한 범인凡人이 있다면 난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선택할텐데 아마 그건 내 스스로가 꾸준함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유형의 사람이기도 하고 조금 선천적인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쌓이는 시간과 땀의 흔적을 통해 좋은 성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이기도 하다. 예전에 본 소설가 성석제씨의 인터뷰에서, 이른 아침 직장인들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매일 정해진 일과에 따라 펜을 잡기 시작한다는 대목이 참 인상적이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고 일정한 질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 후반. 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치열한 경쟁을 가위바위보로 뚫고!! 1학년과 3학년 때는 영화감상부에. 2학년 때는 만화감상부에 이름을 올렸다.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두편씩 영화를 보는 내 여가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영화관에서 볼 때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졌지만, 교실에서 볼 때는 담당 선생님이 영화를 직접 골라오셨다. 선생님께서는 자코 반 도마엘의 '제 8요일', 임순례의 '세친구' ,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 히치콕의 '이창'과 같은 작품들을 쉴새없이 보여주셨고 우리는 모두 볼모(?)로 잡혀 저 영화들을 감상했다. 당시엔 영화를 모두 이해하지 못했지만, 성인이 되어 영화 목록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나도 나중에 아이들에게 좋은 작품들을 많이 소개해..
천국을 방문할 수 있다면, 누굴 먼저 만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국을 엿볼 기회가 없으나, 가끔 죽음의 문턱에서 다른 세상을 본 사람들의 기사를 접한다. 대부분 흔한 가십거리로 생각하면서 넘겨버리고 말지만... 마크 트웨인의 계승자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의 작가 커트 보네거트는 이런 궁금증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이 작품을 내놓았다. 소설이라 하기엔 갈등이나 서사구조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개인잡문집이라고 봐야 더 적절할 것 같다. 나의 천국 여행은 캔디와 함께! 예쁜 삽화들은 덤 ^^ 이 작품에서 커트 보네거트는 닥터 키보키언에 의해 독극물주사 사형실에서 임사체험을 시도한다. 그리고 천국을 방문해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은 뉴턴이나 히틀러 같은..
작년 겨울에 재밌게 읽었던 마스다 미리ますだ ミリ의 만화책들.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해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차분하고 담백한 책이다.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내가 정말 원하는건 뭐지? 주말엔 숲으로 눈에 띄는 갈등이나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가 있지도 않지만 잔잔한 에세이를 읽듯이 생활에서 누구나 느낄만한 감정이나 순간순간들을 담고 있어서 어쩐지 책장을 덮고 나면 자꾸 생각이 났다. 극히 현실적인 삶의 이야기. 직장생활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작년엔 단권으로 사서 읽었었는데, 이번에 신간이 한꺼번에 나오면서 여자공감만화 시즌2라는 세트로 묶여서 나왔다. 이전에 내가 읽었던 3권은 시즌1로 묶여서 판매 중이고 :D 예약판매로 신청을 해서 오늘 ..
SF 엽편소설을 주로 써온 호시 신이치ほし しんいち . 50-90년대에 활동해온 일본 작가이다. 장르소설을 특별히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작가의 소설들만은 묘한 매력에 끌려서 팬이 되었다. 대부분 10-20분 정도면 읽을만한 길이의 짧은 소설로 이루어져 있어서, 핸드백에 넣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기에 적당하다. 사실 이 작가의 작품들은 '본격적인 장르소설 애호가'들에게는 그리 선호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엽편소설의 특성상 SF소설에서 쓰이는 잡다한 설명을 할수 없기 때문에 타임머신처럼 누구나 다 알법한 기본적인 소재들만 선택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소설들의 매력은 독특하고 촘촘한 세계관이나 거대한 스케일에서 온다기 보다는 구성에서 풍기는 매력이나 결말의 반전에서 오는 작은 재미에서 기인한다..
오늘도 집을 나서서 출근을 한다. 마을 버스를 타고 골목골목을 지난다. 가끔 햇빛이 좋은 날. 바람이 유쾌한 날엔 일찍 나와 길을 걷기도 한다. 주택가를 지나면 나오는 빌딩숲. 넓직한 차도들. 한강변의 공원들과 나무들. 그리고 다시 나오는 크고 작은 아파트들.매일 오가는 식당가들, 도서관들. 커다란 학교건물들. 날이 더울 때면 종일이라도 머무는 카페촌. 차가운 강바람. 가끔은 창문을 크게 열고 바람 소리를 들으며 스크린을 내리고 집에서 영화를 본다. 내 노트북은 방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고, 정면 창가 바로 아래엔 빨간색 소파가 놓여져 있다. 창문을 바라 보면 커다란 은행나무가 사르륵 잎사귀 스치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다. 요즘같은 장마철이면 유독 빗소리가 커다랗게 들리는 공간이다. 마음이 적적해질 ..
"이곳에서 우린 영원한 이방인이야, 또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은 우릴 이방인으로 보겠지. 우린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우리는 유배자, 방황하는 영혼일 뿐이야" "사람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면, 식물을 좋아하게 된단다. 스폴레부스크(치명적인 독초)보다 독한 사람에게 데고 나면 말이지." 첫사랑의 흔적을 잘 보여주는 책. '초속 5000킬로미터' 바스티앙 비베스의 '염소의 맛'이 미처 이루어지지 못한 아릿한 사랑의 설렘을 보여준다면 이 작품은 나이들어가는 인물들의 쓸쓸함과 내 마음 속 중심이었던 사랑이 어느덧 추억이란 이름으로 덮여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시작은 아버지가 떠난 후 이탈리아의 소도시로 이사온 루치아를 그 맞은편에 살던 피에로와 그의 친구 니콜라가 훔쳐보..
오페라 라보엠의 아리아와 동명인 이 소설은 액자식 구성으로, 우연히 주인공에게 흥미를 느끼게 된 작가 H의 서술로 이루어지는 외화. 그리고 주인공 '장운형'의 1인칭 시점인 내화로 짜여져 있다. 내화는 장운형의 유년기 /L과 E 두 여성과 장운형의 관계. 3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한강의 작품엔 예술가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한 감각을 지닌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덕분에 작품을 읽는 내내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고, 마치 오랫동안 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처럼 소설의 감정을 계속해서 되씹어보게 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조각가'이다. 그는 주로 여성들의 손이나 인체를 석고로 떠서, 뜯거나 긁어 변형을 시키는 작품을 만든다. 보통 어떤 작품이나 사람에 끌리는 이유는,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지..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 감성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은 흔한 책일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작가의 이름이 낯익어 이력을 확인해보니, 제3공화국 조선/동아일보 해직사태를 거쳐서 한겨레 논설위원을 지낸 바로 그 '김선주'씨였다. 가끔 여성언론인이나,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을 거론할 때 이름을 올리곤 하는 그녀. 담백하면서도 강단있는 글솜씨가 좋아서 기억에 남는 사설들을 확인해보면 김선주씨일 때가 많았는데 반가웠다. 이 책은 그동안 그녀가 써왔던 글들을 모아놓았는데, 그 시기가 저마다 달라서 굉장히 다양한 주제와 생각들을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시사저널 사태처럼, 한참 잊고 있다가 오랜만에 글을 읽고 다시 떠올리게 된 이슈들도 있다. 어떤 것은 내 생각과 비슷하고, 어떤 것은 다르기도..
저자만 보고 이 책은 무조건 사야지.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에겐 이청준, 장영희, 알랭 드 보통,움베르트 에코,베르나르 베르베르, 신영복, 오정희, 한강.. 정도의 작가가 그러하다. 그리고 오늘 말하려고 하는 책을 쓴 '요네하라 마리' 역시 이름만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작가이다. 작가의 전작을 모두 소유하겠다고 마음 먹게 되는. 위에 나열한 작가들 중 가장 재밌고 가벼우면서도,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가를 뽑으라면 단연 '요네하라 마리'일 것이다. 읽는 내내 소소한 웃음을 짓게하는 재주가 있는 여성작가다. 출판사 '마음산책'의 요네하라 마리 시리즈들은, '유쾌한 지식'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각 책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와 주제는 모두 다양하고, 글의 무게 역시 제각각 다르..
일본드라마 '수박'은 어린 주인공이 형편 없이 망쳐버린 시험지를 태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뒤이은 장면에서는, 쌍둥이자매가 주인공에게 다가와 이제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종말이 올테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준다. 나른한 매미소리와 전원적인 풍경, 여름날의 습기와 무더움이 지구멸망과는 너무 동떨어진 느낌이라 인상적이었는데, 2013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김미월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읽다가 저 장면이 문득 생각이 났다. 만약 내일 지구의 마지막 날이 온다면,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할까? 종말을 다룬 영화나 만화들은 수없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종말 전후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파괴, 광신론적 행위를 급박하게 그려내고 있기에 우린 종말..이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면, 언제나 몸을 움츠리며 불..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 자리가 생겼습니다. 오직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결혼식에서 '검은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할 것을 맹세하고, 연애시절엔 너와 함께 죽을 때까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죽음 그 직전까지 애정이 변치 않는 커플은 그리 많지 않다. 보통 이런 책은 좀 낯간지러운 느낌이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 책 'D에게 보낸 편지'가 특별했던 이유는 작가가 아내가 불치병에..
소개팅이나 기타 다른 경로를 통해 이성을 만났을 때, 분위기나 모든 것이 좋았는데 '왜 그는 연락하지 않지?'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혹은 '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라고 고민하는 경우는 누구나 한번쯤 겪는 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전화해서 물어보기도 어색한 일이고, 물어본다고 해서 상대방이 솔직하게 대답해줄리도 만무하다. 때문에 우리는 비슷한 실수를 거듭 반복하며 연락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거나, 혹은 단순히 내 외모나 조건의 문제라고 자책하기 마련이다. 만약 누군가가 연락 없는 '그'에게 연락을 해서, 솔직한 그의 마음을 내게 말해준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내 단점과 장점을 잘 알수도 있을 것이고, 다음번에 같은 실수를 해서 상대방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일도 방지할 수 있을 ..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부터 트라일라잇 시리즈까지 오랜 시간동안 사랑 받고, 변형되어온 인물. 드라큘라 아주 어렸을 때 우연히 '드라큘라'를 tv에서 본 기억이 지금도 어렴풋하게 남아있는데, 무서운 것보다도 흡혈귀 여자들이 너무 예뻐서 정말 깜짝 놀랐었다. 그 중 한명이 모니카 벨루치였으니 당연 ㅎ 트라일라잇 시리즈에서는 핏기없이 하얀 얼굴에 이성적인. 하지만 채식주의자-_-;인 드라큘라 가족들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드라큘라에서 비위상하지 않을만한 점만 차용해서 쓴 캐릭터는 별로 매력도 없고 비겁한 느낌이 들어서 좋아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저 코폴라 감독의 영화가 생각났는데, 원작소설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해내려 한 작품이라 자연스럽게 장면들이 떠오르더라. 드라큘라는 자신의 고성이..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엘제아씨'를 원작으로 한 그래픽 노블. 슈니츨러는 '와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 소설인 '꿈의 노벨레'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엘제아씨'는 몇년 전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판된 소설이라 읽어본적이 있었는데, 그래픽 노블로 나왔다고 해서 궁금함에 사놨던 책이다. 원작소설처럼 주인공 '엘제'의 독백과 서술이 작품을 이끌어 가는데, 사교계의 위선에 대해 엘제가 느끼는 역겨움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절망감이 주를 이룬다. 엘제는 친척집에 놀러온 상류층 아가씨이다. 아직 19살의 어린 나이지만 삶은 우울하기만 하다. 아버지는 파산직전에, 주변 인물들은 모두 점잖아 보이지만 사실 위선적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경제적 위기를 엘제가 구원해주길 바란다. 아버지의 친구로 오랜기간 알아온 신사를 ..
미드 GRIMM을 보면 내가 잘 모르는 동화들, 혹은 이름만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들이 등장해서 제대로된 동화책을 구비해야겠다 싶어 구입한 서적이다. 동화책 사모으는걸 좋아해서 요즘 나온 유명한 동화들은 이런저런 작품들을 많이 봤고, 한국의 설화들은 구비문학대계 같은 책으로 접하면 되는데 외국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체계적으로 모아놓은 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크리스치안 슈트리히가 엮고, 타트야나 하우프트만의 그림이 실린 아름다운 이야기책으로 약 700페이지에 걸쳐서 세계 각국의 동화와 민담 100편이 실려 있다. 그림을 5년에 걸쳐 600점이 넘게 실었다고 하는데, 정말 그림들이 참 섬세한 수작이다. 58000원이 정가라 살짝 압박이긴 한데 중고서적에서 2만원도 안되는 가격에 사서 매우 좋았다. 하드케이..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에서 가장 먼저 읽은 '동물 농장' 가장 먼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사실 단순한데 이 즈음에 007 시리즈 중 보지 않은 것들을 찾다가 북한을 적으로 내세운 '어나더데이'를 보게 되었고 다니엘 크레이그가 주연한 스파이엔젤도 같이 봤다. 얼마 전에 재밌게 읽은 여행기도 쿠바를 다루고 있고, 곁다리로 프리다 칼로와 트로츠키의 염문을 다룬 구절도 있었어서 자연스럽게 손이 간 것이 이 '동물 농장'이었다. 공산주의 혁명 전후의 러시아를 대유해놓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읽은지 너무 오래 되어서 내용도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다시 본거라 거의 처음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뭐랄까. 책에 대한 지식은 다 있고 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막상 세부 내용이나 분위기는 모두 잊어버린 그..
인터넷에 흔하게 돌아다니는 게시물 중 하나는, 남녀의 언어적 차이에 대한 것이다. 대체로 남자의 말은 직설적이고 함의하고 있는 바가 없으며, 여성의 것은 좀더 은유적이고 심지어 반어적이며 복잡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왜 여자들은 서로에게 칭찬을 하거나 맘에도 없는 말을 할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회적인 요인이 있을까. 여성학&정치학 전공자인 레이철 시먼스가 저술한 소녀들의 심리학은 '그들은 어떻게 친구가 되고 왜 등을 돌리는가'라는 부제를 담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하게나마 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자는 자신이 따돌림을 견뎌냈던 경험을 떠올리며, 1년이 넘는 시간동안 10개 학교와 작업한 것을 이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소녀들과 비신체적 ..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많은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 중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나의 부모.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양육태도와 가계의 역사이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단 한번도 마주한 적이 없어도, 부모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과거 부모님을 대했던 조부모의 모습을 시간을 거슬러 마주하게 된다. 이 작품은 데이비드 스몰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작품 내내 건조하고 어둡고 냉담한 기억으로 점철된 한 소년의 기억을 보여준다. 처음에 데이비드 스몰 부부가 그린 동화책을 생각하고 아름답고 훈훈한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표지 이미지부터 예상과 꽤 달라서 다시 작가를 확인한;; 바늘땀에 나오는 주인공인 데이비드는, 백인 중산층 소년이다. 의사인 아버지, 어머니,..
요즘 열심히 봤던 만화. 오마이뉴스에 연재되었던 것이 책으로 묶여나왔다. 아마 한국인이 팔레스타인의 근현대사를 그려낸 건 처음일 듯. 준비기간은 팔레스타인을 2차례 오가며, 총 4년정도 걸렸다고 한다. 지금 1권까지 나온 상태인데, 구약성서에 나오는 기원전 2100년부터 1987~1993년 1차 인티파다(민중봉기)까지의 팔레스타인 역사를 다루고 있다. 1990년대부터 최근의 역사는 2권에서 다룰 예정. 오마이뉴스 연재링크는 여기에. http://star.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8007 아래는 프롤로그.
제1회 자음과 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인 소설. 작가인 박솔뫼 씨가 등장했던 팟캐스트를 듣고 찾아 읽게 되었다. 나와 동갑인 작가의 이력을 읽고, 아 이제 드디어 내가 속한 세대에서도 주목받는 작가들이 등장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와 동일한 시대를 살아온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의 틀은 어떠한지. 어떤 사다리를 놓고 어느정도의 높이에서 세계를 관찰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작은 포켓북 사이즈라 금방 읽겠다 싶었지만, 초반부에서부터 약간의 혼란을 느껴야 했다. 보통 소설을 읽을 때 인물들의 성격과 관계를 대략 정리하고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는 편인데, 국적도 인종도 성격도 살아온 인생도 모두 베일에 싸여있는 작품 속 상황에 적응해야했기 때문이다. 이름 역시 성별이 잘 매치되지 않아서, '을'은 여자주인공, '민..
이 책은 평범한 직장인이던 오영진 씨가 1년반 동안 북한에 파견근무하게 되면서 겪은 이야기를 소소하게 풀어놓은 책이다. 원래는 기 들릴의 '평양'을 보고 싶었지만. 중고서점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절판서적인 관계로 다른 책들을 찾다가 오영진 씨의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말이 어느정도 통하는. 그리고 평범한 한국인이기에 좀더 친근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이 책은 기 들릴의 시니컬하고 관조적인 말투와는 달리, 한민족으로써 느끼는 복잡미묘한 시선이 담겨 있다. 감상적이거나 눈물콧물을 짜게하는 대목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다보면 어딘지 훈훈한 정이 느껴져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와 다르고, 사상과 언어도 조금씩 달라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북한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