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소리내어 책 읽기 (295)
언제나 날씨는 맑음
내가 암에 걸린다면? 이라는 가정은 떠올리기 조차 찜찜한 질문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암선고를 받은 순간 비장한 음악이라도 깔아주지만 현실에서는 수술과 재발위험, 그리고 가족과 본인의 고통만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병이 '암'이니까. 당장 가족은? 치료비는? 직장은? 이후의 내 삶은?....끝도 없는 물음표를 던지게 한다. 불치병이 아니면서도 불치병스러워서, 수술을 한다고 해도 어떻게 언제 전이될지도 모르며 무지막지한 수술 비용과 유쾌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울게 뻔한 지리한 치료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주변에서 한두사람은 찾아볼 수 있을만큼 흔한 병. 머리빠짐과 멍한 눈빛과 무기력함으로 표현되는 병. 그 중에서 여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유방절제술이라는 무시무시한 과정과 함께 가는 유병암일 것이다..
'풍장의 교실'은 야마다 에이미의 단편소설 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좀 어수선한 느낌 때문에 단편소설집들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다가 질리는 감이 있어서 일본소설을 좀 멀리하고 있는터라, 평소라면 구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처음 접하는 작가고 흡입력이 좋고 강렬했다는 평이 있어서 시험삼아 읽어보았다. '풍장의 교실' / '나비의 전족' / '제시의 등뼈'가 수록된 작품들의 제목들인데, 꽤 이질적인 단어들을 제목으로 결합시켜서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또 같은 이유로, 어떤 내용인지 쉽게 가늠할 수 없어서 읽고 난 뒤에서야 아 이런 의미였군 하고 되새기게 된다. 여성작가답게 여성의 심리를 피곤할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고, 일본소설에 흔하게 등장하는 냉소적이고 내향적인 아이들이 이곳에..
- 정원에 쌓인 눈에서 반사되는 빛 덕분에 창밖의 눈사람이 보였다. 눈사람은 외로워 보였다. 누군가 모자나 목도리를 둘러줘야 한다. 아니면 손에 빗자루라도 쥐어주든가. 순간 구름 뒤에서 달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내자, 가지런히 늘어선 눈사람의 새까만 이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두 눈동자도. 요나스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쉬며,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 조약돌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 눈은 그 집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요나스의 방을. -해리는 베르하우스 바다표범을 생각했다. 번식기에 짝짓기를 끝낸 암컷 바다표범이 그 후의 번식기에는 두 번 다시 같은 수컷을 찾아가지 않는다는 이야기. 생물학적으로 불합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베르하우스 바다표범은 분명 똑똑한 짐승이다. 평소에 스..
추측하건데, 아마 김영사에서 출판 중인 '하룻밤~' 시리즈와 동일한 계통의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1학년 때 PT 준비하면서 참고자료를 찾다가 알게되었던 책인데, 요즘 학생들용 자료를 만들다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 이 책은 푸코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입문자용 서적이다. 푸코의 저서들을 읽다가, 그 책과 책 사이의 연관성을 쉽게 잇고 싶다거나 그의 사상 전반을 쉽고 재밌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강추할만하다. 나도 읽으면서 애매했던 개념이나 사상들을 이 책에 등장하는 갖가지 예와 그림들을 통해 쉽고 명확하게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푸코가 저술한 유명 서적들을 모두 다루고 있으면서도, 구성이나 그림들이 아주 인상적이라 이해가 쉽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재밌음! 게다가 ..
'미국판 강남좌파의 백인문화 파헤치기' 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이 책은, 알고 보니 몇 년 전 한참 낄낄거리면서 보게 했던 홈페이지의 주인 '크리스천 랜더'가 펴낸 것이었다. (http://stuffwhitepeoplelike.com/) 이런 책의 특성상 거칠게 일반화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소위 리버럴하고 정치적으로 PC하다고 여겨지는 지식인층의 허위 의식을 얄밉도록 잘 포착해서 까발리고 있기 때문에 읽는 내내 헛헛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고학력의 세련된 '진짜 백인' 좌파들이 가진 문화와 그들이 신성시 하는 것들이 줄줄 나열되고 있는데, 이를 언급하는 방식이 꽤 냉소적이면서도 풍자적이라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읽으면서 잠시 놀랐던건, 한국의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쉽게 볼 수 있는 허례허식과 미국..
더위를 피하기 위해 쿨매트+에어컨+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무장하고 이 소설의 첫 장을 펼쳤을 때, 가장 눈에 띈 것은 사실 소설가 박민규씨의 외모였다. 치렁치렁한 긴머리와 선글라스, 국방무늬의 바지,메탈팔찌 등은 이 사람이 소설가인지 락가수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는데 작가의 초기작이라 그런지 다른 작품들에서 봤던 그의 모습보다 더 강렬한 프로필 사진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그리고 드는 생각들은, 당연히 정형화되고 얌전한 내용은 아닐거라는 느낌이었고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추상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된 작품이면 곤란한데..라는 걱정이었다. 집에 있어도 벗어날 수 없는 불볕 더위 탓에, 유쾌한 작품을 보기 위해서 발랄해 보이는 제목과 표지를 지닌 이 작품을 선택했기에 이 날만큼은 심각하고 우울한 내용은 피하고 싶었..
위화의 허삼관매혈기를 추천 받은 것은 꽤 오래 전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이 선뜻 가지 않았던 이유는 중국문학 자체에 대한 낯섦이 한 몫 했고, (일본이나 서양문학은 유명 작가나 추천작들이 쉽게 잡히는데, 중국문학 특히 현대 소설들은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 없더라.) '허삼관이 피를 파는 이야기'라는 제목이 그리 매력적이거나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나 옷가지가 아닌 피를 판다는 것이 충격적이긴 했지만 신파조로 빠지거나 부성애나 모성애를 억지로 짜내는 글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그가 세상 모든 아버지에게 건네는 따뜻한' 이라는 카피를 본 뒤에는 한동안 책장에 그대로 보관 중이던 소설이었다. 이건 뭐 제2의 가시고기 정도가 되려나 싶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와서야 퇴근 후에..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루시 렌들의 '활자잔혹극'은 꽤 흥미로운 작품이다. 가정부에 의한 일가족의 몰살극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느낌은커녕 작가가 내내 고수하는 인물과의 거리두기 방식 때문에 건조한 느낌이 지배적이다. 지배-피지배계층의 갈등을 강조한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 '의식'과는 달리, 이 작품은 문맹으로 인한 피폐함과 생활과 분리된 탐독이 초래하는 부작용에 초점을 더 맞추고 있다. 교외의 대저택에서 호화롭고 교양있게 살아가는 커버데일 일가에 새로운 가정부 유니스가 들어오게 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커버데일 일가는 부와 교양을 모두 가진 가족인데, 재클린과 조지 부부는 모두 잘 교육받은 지식인층이고 그들의 자녀들과 며느리 역시 70..
최근에 읽었던 서평집 중 하나. 서평집의 매력은 지은이가 가지고 있는 책에 대한 관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올곧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책 역시 그런 점에서 훌륭한 서평집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나쁜 서평집은, 이른바 명작의 반열에 뽑히는 책 혹은 베스트셀러라 해서 자신의 실제 느낌을 무시하고 그저 미사여구만 늘어놓는 글들인데 이 책은 작가의 주관이 매우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고 느낌이나 생각이 아주 솔직하게 나와 있으면서도, 개인적인 편견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시도가 엿보여서 좋았다. 이 작품은 국문학과를 졸업해 '출판저널'과 '도서신문'을 거쳐, 전문 시평가로 활동해던 최성일씨의 시평 모음집이다. 2011년 뇌졸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생애의 반 이상을 책과 함께 한 셈인데 한 출판사와의..
이 책은 이승욱 님이 진행한 다섯명의 개인 상담 과정을 엮어놓은 책이다. 기존의 상담사례집들은 보통 상담과정만을 기술적으로 적어놓는 경우가 많았고, 상담사례를 통해 상담의 예를 보여주거나, 절차를 설명하는 식의 책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주로 내담자의 감정에 집중하거나,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저서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상담전공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전문가용 사례집이라기 보다는, 책 속의 내담자들과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대중 서적에 가깝다. 때문에 기본적인 상담 용어들도 모두 각주를 달아서, 친절하게 표시해 놓은 '-' 또한 기존의 대중 상담 서적과는 달리, 상담이 진행되면서 변화하는 상담자 자신의 고민과 생각들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해놓아서 더 인간적..
발제문 작성하느라 다시 읽어본 불안. 몇 번을 읽어도 좋은 책. 이 책도 겉표지가 싫어서 떼어버리고 심플한 양장본 표지로만 보관 중. 불안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출판사 ‘불안’의 개념 사회적 지위의 낮음에 의해 혹은 자신의 지위에 만족할 경우 현 상태를 지키려는 마음에서 유래되는 불안. 현대에 들어서 사회적 지위는 주로 경제적 성취에 의해 좌우된다. 1.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무엇인가? - 1 :사랑결핍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사랑이 성적인 사랑이며 두 번째는 사회가 자신을 인정해주고 관심 가져주며 중요하게 여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첫 번째 사랑 못지않게 두 번째 사랑을 갈구하는 것일까? 이상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사회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 가는 중요하지 ..
이 책은 양장본 속표지가 무려 흑백의 모자이크 형태라 너무 현란해서, 다른 책들과는 달리 오히려 흰 바탕의 겉표지가 더 맘에 들었다. 붉은색의 어지러운 상황에 싸인, 아기천사의 미소는 사악해질까? 선하게 될까? 필립 짐바르도 교수가 저술한 '루시퍼이펙트'는 무려 7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꽤 두꺼운 책이지만, 읽는데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론 물리적인 시간은 꽤 걸렸지만 심리적으로는 그리 부담이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스탠퍼드대 감옥 실험'의 내용 대부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인가 봤던 'Experiment'라는 독일영화로도 재현된 이 실험은 상황이 어떻게 인간을 변화시키는지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 이미 수도 없이 인용..
풍성한 말꾸러미가 돋보이는 소설. 성석제 특유의 언어유희에서 오는 골계미와 만연체문장이 돋보인다. 촘촘한 내용과 전개를 미덕으로 갖춘 소설은 아니지만, 한바탕 언어의 나라에 몸을 듬뿍 나오고 온 느낌이다. 유쾌하게. 할머니에게 옛이야기 듣듯이 술술 읽힌다. 이분의 소설을 여러편 읽다보면 등장인물들의 어딘가가 자꾸 겹치지는 느낌이 들어 묘하다. 도둑의 도를 말할 때는, 거지의 예를 말했던 모 글이 생각나서 재밌기도 하고. 가장 좋은건, 역시 성석제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연극 혹은 그의 에세이. "야, 이 도둑놈아!" 누가 뒤에서 그렇게 부른다면 백 사람 가운데 아흔아홉은 돌아볼 세상이건만 한 사람만은 묵묵히 자기 길을 갈 것이니 그의 이름은 바로 이치도이다. 제대로 도둑질도 못 하는 도둑놈들이나 남들이 소..
신문사에서 미술담당 칼럼을 주로 써온 손철주씨와 서양미술사 전공자인 이주은씨의 그림이야기.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꽤 되었는데, 그림 관련 글들은 사실 꽤 식상해지기도 했고 그냥저냥 별로 끌리질 않아서 구매하지 않고 있다가 도서박람회에서 세일 중이길래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손철주씨는 주로 동양화를, 이주은씨는 서양화를 통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화답하는 편지의 형태로 이루어져 다소 독특한 느낌이다. 보통 한명의 저자가 그림에 대해 쓸 경우 읽다 보면 다소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은 지리함이 느껴지는데 저자가 두명이고 주제를 정해놓고 주고받는 형식이라 그런 감이 좀 덜했다. 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그림과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기도 했고. 낯익은 그림들도 꽤 보였지만, 처음 보는 좋은 그림들도 ..
아직도 기다려지는 것이 있습니다.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늘가에 떠 있는 새털구름 한 조각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마른 풀잎 같은 것도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씩의 벌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라본 것들 가운데 가장 황량한 풍경의 그 가장자리에 지금 서 있습니다. 벌판을 가로질러 멀리 뻗은 길을 누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걸어가고 있는 그를 나는 누구라 부를까요. 시인의 할 일은 한 송이 들꽃의 잎사귀를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을 묘사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직도 기다려지는 것들과 벌판을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그려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기다려지는 것들의 이름과 가슴속을 자꾸 걸어가는 그의 이..
포토저널리스트 정은진이 담아온 콩고 여성에 대한 사진과 이야기. 이름이 낯익다 했는데,알고보니 몇 년 전 재밌게 읽었던 '카불의 책장수'가 그녀의 책이었다. 사실 포토에세이들은 가볍게 읽을 요량으로 구입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 책들도 그런 성향의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 책은 꽤 무거운 주제. 콩고의 현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어쩐지 소파에 앉아서 읽기엔 마음이 무거워서 바닥에 앉아 무릎에 얹고 읽어내려간 책. 어릴적 'tv 탐험 동물의 세계'를 통해 바라본 아프리카와 뉴스나 신문을 통해 접하는 아프리카는 마치 극과 극처럼 달랐다. 광활한 대지에서 펼쳐지는 초원과 동물들의 자유로운 뛰놈과 대조적으로 이 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식은 매번 내전이나 테러, 아동착취와 같은 어두운 단어로 대표되었다. 멀게는 강대..
이 책을 읽게 된 몇가지 이유들. 1. 웹상에서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몇가지 여성 대 남성 구도에 대한 짜증남 2. 관련 섹션에서 흥미로운 주제의 책들이 발간되어 찾던 중 계속 눈에 밟힘 3. 보슬아치니 정액받이니 입에 담기에도 더러운 단어들에 대한 의구심 4. 여성의 타자화에 대한 분노. 동시에 약하고 힘이 빠진 (?) 남성들의 한탄과 분노가 쏟아지는 것에 대한 안쓰러움. 5. 꽤나 패기찬 제목에 거침없는 문장들이 인상 깊었는데, 알고보니 저자가 48년생의 이제 은퇴한 동경대 명예교수라는 놀라움. 그럼에도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 중이다. -일본의 드라마나 신드롬에 빗대어 설명해서 몇가지 안맞는 점이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한국과 매우 유사하다. 여러가지 에피소드들과 학자들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남성과 ..
아주 오랜만에 읽은 동화. 그림이 아름다운 동화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게 되면 물려준다는 핑계로 구입한 동화책 중 하나이다. (전공은 못 속이는건지 이런 동화책들을 고르다 보면, 교육학 공부하면서 배웠던 아동의 성장발달과정이 눈에 그려져서 작품별로 언제쯤 읽히면 좋을지 대충 그려보게 된다 -_-;;;) 샤워 한 뒤에 소파에 앉아서 스탠드 하나만 켜놓고 아이에게 읽어준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나지막하게 소리내서 읽었다. 이 작품은 2008 프랑스 아동청소년문학상 수상작가인 막스 뒤코스의 글과 아름다운 그림으로 꽉 채워져 있는 수작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한 화가답게, 아주 섬세하고 화려한 색채가 눈을 즐겁게 한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동화와 비교해도, 그림책 그 자체의 기능을 가..
이성복 시인의 아포리즘. 이분 꽤 이목구비 또렷한 미남이신데, 젊으실 적엔 헤어스타일이(...) 강신주 선생님 강의 듣다가 추천 받아서 샀는데, 얇고 가벼워서 부담이 없는 책. 하지만 문장이나 생각만은 묵직하고 힘이 있다. 시인 특유의 날카로움이 묻어나는 표현들도 좋고. 소파나 침대 근처에 두고, 마음이 아플 때나 머리가 복잡할 때 집어들고 읽는다. 그럼 이 건조하고 예리한 문장들이, 어쩐 일인지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게 한다. 신기하게도. 삶은 아무것도 속이지 않는다. 정직하게 시간의 칼을 휘두르며, 자기의 변화를 완성할 뿐. 우리의 고뇌는 신의 출현방식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집에다 싸움판을 벌여놓고 가출한다. 그들은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이미 제기된 문제를 미루거나 포기하고 새..
새로운 테르마이(목욕탕) 양식에 대해 고민하던 로마 부흥기 때의 건축가가 우연한 계기로 타임리프. 현대 일본의 목욕 문화를 경험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2010 일본 만화대상, 14화 데즈카오사무문화상 단편상을 수상한 수작이다. 작가가 이탈리아 피렌체 예술학교에서 유화를 배운 다소 독특한 이력의 여성. 일본과 로마의 목욕 문화를 모두 비교하면서 볼 수 있어서 흥미진진했다. 단순히 몸을 씻는 것이 아니라, 몸을 정화하고 명상에 잠길 수 있는 휴식과 충전의 시간. 로마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주인공이, 평안족 노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일본인의 기술에 좌절하는 장면들. 그리고 이를 적용해 자신이 처한 건축상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에피소드들이 매우 재밌어서 단숨에 읽어나갔다.. 현대 일본의 목욕도구나 목..
채식주의자는 세 편의 중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영혜)의 남편이 서술하는 '채식주의자' / 그녀의 형부가 말하는 '몽고반점'/ 영혜의 언니가 이끌어나가는 '나무불꽃' 은 작가의 말처럼 '따로 있을 때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해지면 그중 어느 것도 아닌 다른 이야기-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담기는 장편소설'로 완성되고 있다. 이 소설을 처음 봤을 때는 최근 들어 트렌디해진 '채식주의'라는 단어를 도대체 작가가 어떻게 풀어갔을지 감이 오질 않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첫장부터 미처 덜 익은 밥을 허기져서 허겁지겁 손으로 퍼먹듯이 급속도로 빨려들어갔다. 가끔 어서 이 뒷부분을 읽고 싶은 탓에, 눈이 읽는 속도와 마음의 속도가 엇박자를 일으킬만큼. 이 소설의 주인공 영혜를 ..
...추억은 참으로 불확실해진다. 추억은 당신에 대한 초상을 유지한다.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서 내가 본 그림들처럼, 흐린 세부 묘사와 선으로 스케치된 추상적인 초상. 나는 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만, 당신에 대한 나의 추억은 계속 변하여, 나는 그림을 고쳐야 한다. ...어쩌면 나는 늘 당신이 나이 들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매력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당신이 더 약해지도록. 그러면 우리가 동등할 수 있을 테니까. ..."당신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해? 왜 열심히 당신 조각품을 팔려고 애쓰지 않아?" 내가 묻는다. "왜 당신은 늘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 당신은 집을 갖고 있어.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나는 계속한다. "돈이 큰 문제라면, 우린 그냥 당신의 서양 돈으로 부..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겼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
천명관은 '고래'로 처음 접하게 된 작가인데, 요 몇년간 주로 인문사회서적 위주로 읽었던 탓에, 04년도에 나온 소설을 이제야;; 읽는 내내 정말 입심이 대단하다는 감탄이 저절로 터져나온다. 이 작품은 만연체에 변사를 연상시키게 하는 내러티브를 취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서 옛날 이야기를 직접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마치 백년동안의 고독이나 한국구비문학대계를 뒤적일 때와 비슷한 느낌. 같은 이야기도 그것을 전달하는 구술자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달라질텐데, 이 작품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고구마를 까먹으며 듣는 아련함 보다는 입심 걸한 옆집 할아버지를 통해 듣는 거침없음과 장대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전근대-근대-탈근대를 각각 상징하는 노파-금복-춘희로 이어지는 3대의 여성사를 다루..
1. 상처에 대하여... '데미지'는 거친 섹스와 인물들의 불안정한 심리 묘사, 그리고 의도적인 자기 파괴가 아슬아슬하게 섞여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자극적인 소재에 비해 전개는 꽤나 스피디하고 간결하다. 촘촘하게 짜여진 개연성 따위는 주인공 시점으로 건너뛰었고, 꽤 심한 비약으로 인한 빈구멍을 독자가 찬찬히 상상과 추리로 채워넣어야 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의 원제는 '아주 성공적인(Very Successful)'인데 영화 '데미지'의 원작으로 잘 알려진 소설이라, 아마 국내 출판 때는 원제를 버리고 '데미지'라는 제목으로 사용한 것 같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고 핵심적인 대목을 꼽자면 'Damaged people are dangerous'이다. '한비자'에는 전설 속 영물에게도 특별한 상처가 있..
쥬드 데일리 그림 노경실 옮김 도서출판 산하 펴냄 노경실 선생님께서 주신 '우리 서로 사랑할 때에' (이왕이면 싸인도 해서 주시지...^^) 가끔 기교부린 어른들의 책보다 담백하고 직설적인 동화책이 와닿을 때가 있다.
첫사랑이란 말이 스칠 때마다 지루한 시간은 맥박 치며 빛났다. . . . 나는 이것저것 좋은 나들이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나를 비춰보았다. 어떤 옷은 점잖아 보이고, 어떤 옷은 촌스러워 보이고, 간혹 요염해 보이는 옷도 있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에게 해준 최초의 찬사는 구슬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구슬 같은 처녀이고 싶었다. 그 남자네 집, 박완서
'부아지지'와 '포고노포르'를 생각함 나는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훨씬 더 많은 사람입니다. 싫어하는 것에 관해서만큼은 저는 엄청난 부자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줄어들고 싫어하는 것은 자꾸 재산처럼 늘어갑니다. 싫어하는 게 늘어갈수록 하고 싶은 일은 점점 줄어듭니다. 하고 싶은 일이 줄어들수록 시를 쓰는 이 일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일만 하고 삽니다. 시를 쓸 때에만 나는 싫어하는 것이 많은 나를 좋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후략)
스타일의 작가 백영옥. 칙릿소설들은 좀 기피하는 편이라 읽을 일이 없었던 작가의 소설인데, 요즘 전자책을 대여해서 읽다가 눈에 띄어서 접하게 된 책이다. 명작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간간히 좋은 문장들이 있어서 의외였는데, 다이어트라는 소재 자체가 워낙 흔해서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지 사실 가벼운 주제는 아니다. 소설 속의 내용과 현실의 괴리감이 거의 안느껴질 지경이니, 이 세상이 물질만능주의나 외모지상주의에 미쳐돌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려나. 부끄러움 없이 돈이나 외모가 최고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니까. 어찌되었든 눈에 띄었던 문장들을 남기자면. *내가 왜 여행을 자주 가는지 알아? 그건 빠르게 사라지는 시간이 두렵기 때문이야. 여행은 일상속의 시간을..
독서모임을 통해 읽게된 책. 동서양 사고의 차이를 다룬다는 꽤 야심찬 포부. 이미 문화별 사고의 차이를 다룬 책을 몇차례 본적이 있고, 동서양 사고의 차이야 대략적인건 익히 들어와서 또 새로운 어떤걸 다뤘으려나 하는 심드렁함 반. 그래도 학자가 쓴 책이니 뭔가 새로운 것이 있겠지하는 기대감 반으로 도서관에서 읽어내려갔다. 가설과 실험을 통한 결과를 다루고 있는 책이니, 굳이 분류하면 과학서적이겠지만 동서양의 사고의 차이를 챕터별로 분류해 간략하게 다루고 있어서 어렵다거나 딱딱하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다만 실험대상자에 대한 정보나 실험과정, 통계나 정확한 수치가 전혀 나와있지 않아서, 약간 의구심이 드는 정도?;; 저자 니스벳의 제자인 최인철 교수가 번역했는데, 쉽게 읽히는 대신 자잘한 실수가 많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