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소리내어 책 읽기 (295)
언제나 날씨는 맑음
작년에 재밌게 읽었던 만화책 중 하나는 데즈카 오사무의 '아돌프를 위하여' 였다. 연초에 상상마당에서 우연하게 봤던 이 책의 뒷부분이 너무 궁금해서 결국 만화책을 구입해서 마저 보았더랬다. 그 이후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지역에 관심이 생겨서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다시 뒤적였고, 아리 폴만 감독의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을 챙겨봤다. 결국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 에 이어, 오늘 글을 쓰려고 하는 '굿모닝 예루살렘'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위의 작품들을 보면서, 예전에 마르얀 스타라피의 '페르세폴리스'를 보면서 궁금했던 것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형상화 돼서 참 좋았다. '굿모닝 예루살렘'은 기 들릴의 이전 작품들처럼 '국경 없는 의사회-MSF-'에서 일하는 아내를 따라 예루살렘에서 1년간 체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꽤 많은 작품이 영화화된 유명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소설을 접한 건 이 책이 처음이다. 그 이유는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면, 추리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작품이 영화화된 리플리 시리즈 같은 것은, 대부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것들이라 본적이 없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리플리라고 하면, 난 정신병 내지는 mbc드라마 '미스리플리'만 떠오를 뿐 ;;) 이 책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선집 4권 중 하나인데, 위와 같은 사항들 때문에 내가 이 책을 구매한건 순전히 '제목이 독특해서'였다. -동물애호가를 위한 잔혹한 책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이렇게 차가운 느낌이 나는 제목에 끌려서, 두 권을 구매하고야 만 것이다. =ㅁ= 동물애호가를 위한 잔혹한..
김영하 작가의 오빠가 돌아왔다를 꺼내든건 그의 팟캐스트를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다.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역시 술술 읽혀서, 다른 일들 때문에 책을 한두번 덮은 것을 제외하면 거의 중단하지 않고 단시간에 읽을 수 있었다. 2004년에 나온 동명의 단편집이 재출간된 것인데, 내가 가지고 있는 판본은 2010년에 나온 후자의 것이다. 이 책을 이렇게 오래 방치해둔 것은 김영하의 책을 읽을 때마다, 뭔가 불편하고 갑갑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건 비교적 위트가 넘치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같은 단편집에서도 그랬고 '빛의 제국'이나 '퀴즈쇼'와 같은 장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난 그의 장편집을 꽤 힘겹게 읽거나 아니면 차라리 빠른 속도로 끝내버리는 편이었는데 같은 이유로 딱히 리..
예전에 남자친구가 명절에 부모님께 용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장인인데 아직도 용돈을 받아?'라고 장난스럽게 되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대답이 꽤 신선했는데, '노인네들 늘그막에 이렇게 자식들한테 조금이라도 용돈 쥐어주시는게 쏠쏠한 재미신가봐. 이제 다 퇴직은 하셨지만, 부모 노릇하시는 기분이라고 받아가라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나도 이제는 별말 없이 용돈 드리고, 명절에 가면 나도 받고 그래' 라고 했다. 그래 생각해 보니까. 우리 엄마도 이제 요리를 다 할 줄 아는 나에게 언제나 본가에만 가면 그렇게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쉴새 없이 내 입에 물려주려고 안달이셨던 것이다. 마치 내일이면 굴 파고 길고긴 동면에 들어갈 북극곰 마냥. 그러면 나도 '아..엄마, 나 배부른데' 하면서도, 아기새가 어미..
평소처럼 원테이크로 낭독하면서 녹음했는데, 뒤척뒤척 했더니 잡음이 많이 섞였다. http://www.mediafire.com/?2dyhddvudjddsi4 (덧) 녹음파일에 나오는 스티븐 킹의' 금연주식회사' 전문. 놀랄만큼 비싼 가격. 금연100%를 약속한다. 김난주 씨가 번역을 했던, 백암출판사의 수필집 세트. 총 5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울한 오후의 화려한 예감', '고독한 자유',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세라복을 입은 연필', '랑겔한스섬의 오후' 이다. 오늘 내가 읽은 '세라복을 입은 연필' 은 2002년에 출판되었었다. 내 경우 사실 하루키의 소설보다는 수필들을 몇 배는 더 좋아한다. 그래서 소설은 보통 빌려 읽는 경우가 많았지만, 수필들 만큼은 모두 구매하려고 애썼다. :) 올해 문..
작년과 올해 가장 많이 읽었던 테마는 극지방과 관련된 것들. 유독 더웠던 올 열대야엔 그 지독한 혹염을 잊으려는 생각으로. 눈보라가 부는 겨울밤엔 온몸에 이불을 칭칭 감고. 그렇게 밤을 새하얗게 밝히며 세상 끝의 세계를 방황하곤 했다. 어릴적 위인전에 봤던 위대한 탐험가들을 활자로나마 좇겠다는 의지였는지, 할퀴어진 마음을 더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곳으로 내몰아 바닥을 쳐보려는 마음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꽤 많은 극지방과 관련된 사진집들과 여행기들. 온갖 기록물들을 읽고 또 읽고를 반복했다. 눈의 여왕에게 홀려버린 작은 아이처럼. 때로는 황량함에 신발 속 발가락까지 쓸쓸해질지라도 북극의 땅에 발을 딛고 나는 마냥 걷고 싶었다. 이 책은 경향신문의 최명애 기자& 한겨레의 남종영 기자 부부의 북극여행을 기..
내가 그림 감상을 즐기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예쁜 드레스에 굽실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공주들을 색색의 연필로 칠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아니면 온갖 세상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달리의 그림을 처음 보고 괜시리 막연한 끌림을 느꼈던 때부터였을까?.. 정확한 시점과 결정적인 계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이전부터 도서관에 가면 미술쪽 서가에 가서 예쁜 그림을 뒤적이곤 했고 멋진 이미지의 CF컷이나 사진들을 보는 것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가 조금더 많아졌을 때. 굵직한 전시회들은 빼먹지 않고 되도록 모두 다녀오려고 애썼고 자연스럽게 그림을 담은 책들도 간간히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책들은 흔히 '그림 읽어주는 여자'류의 감성적인 예쁜 에세이라거나 미술전문가들..
남자인 친구들 몇이 계획을 짜서 무인도나 다름 없는 섬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맞는 여름이었을 것이다. 이 섬은 내가 소개해준 장소였는데, 전기도 수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곳이라 여자들끼리 가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남자아이 6명으로 짜여진 이 여행객들은 3일을 묵을 작정으로 그만큼의 라면과 술. 버너와 캠핑도구들을 갖추고 그 섬으로 갔다. 모험놀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MTB도 챙겨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배터리도 충전하기 어려운 곳이라 연락이 힘들 것이란 건 예상했기 때문에, 여행 다녀오면 후일담이나 들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날씨가 너무 안좋아서 배가 뜨지 않아 예정보다 2일정도 더 섬에 머물렀다고 했다. 다행히 완전히 무인..
오늘은 그간 단숨에 읽히지 않아 꽤 애를 먹었던 책을 갈무리 하려고 한다. 앞으로 카버의 소설이나 영화를 몇 번 더 평할 계획이라 이번엔 좀 길게 카버에 대해서 서술할 생각이다. "그는 계속 '나는 너를 사랑해. 너를 사랑해, 이년아"라고 말했어요. 그는 계속 나를 질질 끌고 돌아다녔죠. 내 머리는 계속 뭔가에 부딪혔어요." ... "그런 사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 "맙소사, 멍청한 소리 마, 그건 사랑이 아냐. 당신도 그렇다는걸 알고 있어." .... "당신이 뭐라 해도,난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알아요...아마 자기 방식대로였겠지만, 사랑은 있었어요." .... 그런데 끔찍한 건, 정말 끔찍한 건, 한편으로는 좋기도 한 건데, 우리를 구원할 어떤 은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 만약 우리..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우리집 근처엔 할머니 한분이 이사오셨다. 아파트단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단독주택이었는데, 엄마는 그 할머님과 슈퍼를 오가는 길에 자주 마주치면서 친해지신 것 같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엔, 할머니가 가끔 우리집에서 식사를 하고 가시기도 하고 할머니가 혼자 외로우실 것 같다고 같이 가자시는 엄마를 따라 나 역시 종종 그 집에 놀러가곤 했다. 엄마가 집에 없을 때 혹시 그 집에 놀러갔나 싶어서 찾아가면 할머니는 꼭 그냥 보내지 않으시고 오렌지 주스나 떡 같은걸 내오시곤 하셨다. 특히 할머니가 조금씩 만들어주시는 김치부침개를 내가 아주 좋아한다는걸 아시고는, 그 다음부터는 꼭 냉장고에 부침개 반죽을 만들어놓으셨다. 할머니는 아주 옷을 맵시 있게 입는 편이셨는데, 보라색이나 고..
'중세의 뒷골목 풍경'은 ktf 포인트로 이북을 구매하다 재밌어 보여서 읽게 된 책. 제목 그대로 중세 서민들의 생활모습과 풍속들의 변화사, 귀족층의 결혼, 철가면 사나이, 마녀재판과 같은 흥미로운 일화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미시적인 안목으로 본 역사의 단편들이랄까. 저자인 양태자씨는 독일에서 비교문화학과 비교종교학을 공부한 학자인데, 배경조사를 아주 풍부하게 한 느낌이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사료를 계속 인용하고 있고, 서로 다른 문헌들을 비교해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추적하려고 한 점이 엿보인다. 물론 사생활의 역사처럼 큰 흐름의 맥을 따라서 정치,경제까지 포괄하고 있진 않지만, 실려있는 자료들이 매우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고 내용자체도 어렵지 않아서 마치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 듣는 것 같은 느낌이라..
추천을 받아서 읽게 된 책이었는데, 아마 제목만 보았다면 내가 이 책을 사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외로움이나 상처, 사랑을 제목으로 삼은 수많은 심리학서적들에 질려서이기도 하고, 나를 사랑하는 건 내 스스로의 마음 가짐에 달린 것이지 어디선가 방법을 배워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어던질 준비를 하고 책을 폈다는 번역자의 말처럼, 나 역시 이 책에는 다이어트나 자기관리를 하라거나, 화장법이나 옷입는 법을 바꾸라는 식의 자기계발서에서 숱하게 봐왔던 뻔한 이야기들이 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때문에 이 책을 '추천'까지 한 지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속는셈 치고 책을 구매하였다. 그리고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은 황당함 이었다. 초등학교 ..
갑자기 다시 읽고 싶어져서, 엄마에게 보내달라고 한 책 중 하나. 움베르트의 에코 책 중 가장 가볍고 재밌게 읽을만한 작품이다. 책이 오래 되어서 상태가 안좋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본가에서 곱게 보관해서 세월에 살짝 바랜 것 외엔 괜찮았다. 움베르트 에코가 문학 잡지 '일 베리'에 정규 칼럼으로 기고 했던 글을 모아서 두 권의 책이 출판되었는데, '작은 일기(Diario Minimo)'와 '작은일기 2(IL Secondo Diario Minimo)'가 그것이다.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은 그 중 '작은 일기2'에 해당하는 것으로 '작은일기'는 원제 그대로 한국에서 출판되었는데 아마 2권은 한국어판으로 나올 때 제목을 바꾼 것으로 예상된다. 이 책을 언제 읽었었나 내용도 가물가물하고 잘 떠오르질 않았는..
'라디오천국'을 자주 듣는 사람들이라면 '그녀가 말했다'라는 이 책의 제목이 굉장히 낯익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희열의 목소리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그녀가 말했다'코너의 문장들이 참 좋았었는데 2권의 책으로 출판된 것을 알게 되서 구매해봤다. 사실 평소에 이런 가벼운 수필류로 생각되는 책들은 잘못하면 싸이홈피에 쓸만한 글이거나 너무 날림한 느낌이 들 위험성이 있어서 어지간하면 잘 구매하지 않는 편인데, 라디오를 들으면서 인상 깊었던 이야기들이 많기도 했었고 마침 알라딘 적립금도 꽤 많이 남아서 겸사겸사 주문하게 되었다. 음 책의 전체적인 평을 하자면, 별삼킨별의 예쁜 사진과 글이 잘 어우러져서 가볍게 들고다니면서 기분전환 겸 읽기 좋았다. 사랑이야기만 하거나 심각한 인생의 잠언을 전달하려고 하지 않고, ..
우연히 서점에서 너무 재밌게 읽고, 선물 받은 책. 유명 다큐멘터리제작자와 철학과 교수의 주도로 이루어진 영국의 팟캐스트 오디오 인터뷰를 기초로 구성되어 있다. (www.philosophybites.com) 피터 싱어나 마이클 샌댈처럼 각 분야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대해 일정 주제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윤리학, 정치학, 형이상학, 미학, 인생으로 테마가 구분되어 있고, 각각 5개의 소주제로 다시 나눠지는데 진지한 것도, 흥미로운 것들도 있다. 각 학자들이 나름의 논리를 이용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좋다. 다루는 주제가 가볍고 다소 엉뚱한 것일지라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 자체는 논리정연하고 진지하다 인터뷰어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진행을 하는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나이젤 워버턴 ..
무라야미 하루키가 그동안 썼던 에세이들을 모아놓은 말 그대로 '잡문집' 그의 작품관에 대한 글도 있고, 음악과 음식에 관한 이야기,인터뷰들도 있다. 교무실에 두는 책들은 보통 끊어서 읽게 되어서, 단편집이나 이런 수필류가 적당한데 이 책도 짬짬이 읽는 바람에 꽤 오래 걸려서 책장을 덮게 되었다. 매 장의 제목들이 꽤 멋진. 장수는 500pg로 꽤 두툼하다. 개인적으로 무라야미 하루키의 소설보다는 수필들을 훨씬 더 좋아하는데다가, 예전에 그의 '재즈에세이'란 수필집을 중학교 때인가 아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 책에도 음악과 관련된 글들이 꽤나 많이 나와서 즐거운 독서시간이 되었다. 확실히 자신이 애정을 가진 대상에 대한 글은, 같은 작가라 할지라도 그 깊이가 확연히 다른데 하루키의 경우에는 음악과..
한강 선생님이 첫 장편소설을 낸 98년 여름. 3개월간 아이오와 대학교의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주로 제3세계에서 온 작가들과 보냈던 시간들의 기억. 그리고 프로그램 이후 한달정도의 여행 경험을 통해 느꼈던 단상들을 책 설명에 나와있듯이, 크로키처럼 짧게 짧게 풀어낸 산문집이다. 잘 알려지진 않은. 꽤 오래전의 책인데 워낙 편애하는 작가라 구입한 책이다. 이 사람의 소설 외에도, 산문집에서 느껴지는 평소 생각이나 감정의 선이 궁금했던. 내 친구는 배수아와 한강, 오정희를 동시에 사랑하는 나를 보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했지만. 어찌되었든 난 세 사람 다 좋은걸 :) 아래의 글은 내 생각이랑 너무 비슷한 것들이 많아서 읽으면서 흠칫 했었는데, 요즘 한강선생님이 바라셨던 소설낭송 방송이 꽤 많아져..
네 자신에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네 자신뿐이다. 위녕, 좋은 날씨가 계속된다. 하루 종일 공부해야 하는 너는 어쩌면 이런 날씨가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하겠다.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고 꽃들은 화사하고.....오늘도 가끔 창밖을 보고 있니? 그래 가끔 눈을 들어 창밖을 보고 이 날씨를 만끽해라. 왜냐하면 오늘이 너에게 주어진 전부의 시간이니까. 오늘만이 네 것이다. 어제에 관해 너는 모든 것을 알았다 해도 하나도 고칠 수도 되돌릴 수도 없으니 그것은 이미 너의 것은 아니고, 내일 또한 너는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단다. 그러니 오늘 지금 이 순간만이 네가 사는 삶의 전부, 그러니 온몸으로 그것을 살아라. 너는 어제 어처구니 없이 당한 오해와 공격에 대해 엄마에게 오래..
약속시간 보다 너무 빨리 도착해서 서점에 갔다가 표지가 인상적이라서, 책꽂이에 꽂혀 있던 것을 꺼내서 봤었다. 마그리트 그림에 등장하는 하늘에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붙여놓은 것 같은 느낌. 요즘 라틴쪽 소설들을 읽고 싶어서 이것저것 보는 중이라 손이 갔다. 결과적으로는 근래 본 소설 중 가장 재밌었던 단편소설집이었다. 어떻게 이 책이 그리 잘 안 알려졌는지 의문일 정도로 재밌게 읽었는데 집에 와서도 계속 그 독특한 느낌이 생각 나서 결국 구입해서 마저 읽었다. 환상문학류를 별로 안좋아하는데도 아주 빠르게.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그림에서 느껴지듯이 남미의 느낌이 나는 독특한 환성소설들 여러 편이 들어있었는데, 이 책을 읽은 뒤에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국내 번역된 것은 이 작품이 ..
오정희님의 소설을 읽다 보면 항상 얼음과 불이 공존하는 느낌이다. 그것도 냉탕의 청량감을 느낀 후,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몸을 풀어나가는 온천의 포근함이라기 보다는 드라이아이스에 화상을 입는 것 같은.. 가스렌지의 파랗게 일렁이는 불빛을 바라볼 때의.. 그런 위험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 사진을 봤을 때. 너무 단아하고 얌전한 이미지셔서 깜짝 놀랐었다. 이런 음울한 느낌은 그녀의 장편들 보다는 단편소설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학생들이 주로 배우는 '중국인거리' 나 '동경'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작품은 '완구점 여인'이다.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며 쏘아보는 앙칼진. 작은 여자아이 끝도 없이 아이를 낳는 공장 같은 임산부의 이미지 어딘지 마법적인 휠체어 탄 완구점 여인이 떠오르는 작품인데..
페어뱅크스에 내리는 눈은 언제나 똑같다.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떨어진다. 눈이 아름다운 이유는 지상의 모든 것을 흰 베일로 감싸는 불가사의한 힘 때문이다. 사람의 일생 또한 내리는 눈과 다르지 않다. 눈처럼 쌓여만 가는 고통스런 기억들도 시간이 지나면 차츰 희미해진다. 고통은 사라지고 지나간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만 남게 된다. 그렇게 시간은 흰 눈이 세상을 감싸듯 삶을 정화시켜 나간다. 이런 과정이 인생에서 제외된다면 늙음이란 얼마나 비참한 경험일까. -Northern Lights 中 한 때 마음이 너무 아파서 견딜수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 신호등에 가만히 서있다가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음악을 듣다 보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세상이 끝날 때까지 통곡을 하고 싶었던. ..
어느 여름. 그윽한 참외향이 퍼져나가는 것 같던 밤. 아빠가 좋아하던 멸치국수를 함께 먹고, 이번엔 내가 좋아하는 수박바를 하나씩 나눠 먹으며 대자리에 배를 깔고 드라마를 보던 순간이었다. 아빠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혹시 나중에 남자친구 생기면 어떻게 할래? "응? 몰라. 그건 왜 물어봐 아빠?" "나중에 너 남자친구 생기면 아빠한테 제일 먼저 데려와야 된다. 아빠랑 술 한잔 마시게" 엄마는 옆의 대화를 듣다가,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애에게 주책이라며 웃으셨다. '윤미네 집'은 원래 다른 사진집을 고르다가, 워낙 평이 좋아서 궁금증에 함께 주문했던 사진집이다. 전문 사진가가 아닌. 그것도 예술계통이 아닌 토목공학자였던 아마추어 사진가의 가족 사진이라는 것은 이 사진을 받고 난 뒤에 알게 된 사..
어릴적 가장 좋은 나라로 흔히 들었던 것은 아름다운 풍경과 평화의 나라 스위스였다. 페터 빅셀은 자신의 책(스위스인의 스위스)에서, 스위스인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 스위스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아직도 그 나라에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구나..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엔 스위스. 혹은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심지어 땅이 아닌 죽음 너머의 곳을 선택하는 이들도 매일매일 생겨나고 있다. 지난 70년대에 나는 어떤이의 말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책 한 권을 써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그 책이다. 그때 나는 긴급하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80년대에 들어와 바로 10년 전 그 생각에 사로잡혀 또 한 권의 책을 펴낸다. 이..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2000년대 초반, 나는 아직 어린 학생이었고 그때는 이 문장들이 너무 과격하고 건조하며 어렵게 다가왔었다. 당시 내가 이 소설에서 좋았던 것은 화가 노석미님의 그림이 글과 기가막히게 들어맞는다는 것. 정도였다. 이 소설이 다시 떠올랐던 것은 A의 끝난 연애에 대한 긴 이야기를 듣던 어느 날이었다. 당시 A의 연애는 그녀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 세계관 모든 것을 고쳐야 했으며 때문에 그 연애기간 내내 자아는 흔들리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시험받아야 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잊어갈 지경이었고, 그래서 우울했으며 또한 무기력해지곤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아무리 만류를 해도, 이상하리만치 A는 그 ..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리 반에는 항상 겉도는 여자아이가 한명 있었다. 지혜라고 하는. 중간에 전학을 왔던 난 지혜와 2년의 초등학교 과정을 한반에서 함께 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는 나에게 가까운 대상이 아니라. 조금 떨어져서 멀찍이 지켜보는 대상에 가까웠다. 당시 새로운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고 치마바람 센 학부모도 제법 있었던 우리 동네는 반대로 아직 개발이 덜 된. 비닐로 울타리를 친 회벽칠한 낡은 집들도 함께 공존하고 있었고 때문에 아이들의 입성도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지혜는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아이였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 그 아이의 이름을 발음하면, 다른 아이들의 2배에 가까운 몸집 외에도 거의 1년 내내 볼 수 있었던 낡아 빛바랜 검붉은 초라한 잠바차림이 먼저 ..
'영국의 시골농장에서 보낸 천국 같은 날들'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에세이집. 친구를 따라 예정에 없이 헌책방에 갔다가 책구경을 하는 사이에 무작정 골라 온 책. 회색 바탕의 표지에 붉은 색으로 가지런히 놓은 글자들. '외로울 때마다 너에게 소풍을 갔다' 라는 제목이 참 좋았다. 난 외로울 때 누구에게. 어디로. 소풍.을 가야할까. 화려한 표지 사이에서 혼자 오뚝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회색의 작은 책이 눈에 띄어 집어들게 되었다. 껍질을 벗겨내듯 회색의 표지 한꺼풀을 벗겨내자 마치 일기장을 훔쳐보듯 담담하게 쓰여진 글과 사진, 그리고 소박한 그림들이 담겨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24살의 대학졸업을 앞두었던 작가가 어느날 런던으로 떠나면서 시작된다. 젊음이라고 하면 떠올라야 하는 것은 열정, 희망, ..
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글렌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한번쯤 스치듯 들어봤을 것이다. 절대음감을 타고난 천재이면서도 한평생 대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사람. 이 책은 미셸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데, 이 사람 정말 글렌 굴드 빠구나 싶은 것이 이 얇은 책에 한 사람의 전 생애를 촘촘하게 스캔한듯한 엄청난 자료와 개인적인 생각과 메모들이 뺴곡하게 담겨서 재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좋은 한편으로는, 글쓴이가 생각한 방향으로 글렌 굴드를 편집하고 배치해낸 것은 아닌지 라는 의문도 살짝 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좋은 문장들이 많아서 만족했다. 글을 읽다 보면 그는 연주자나 예술가라기 보다는, 피아노를 대상으로 한 수도자나 고독한 나그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전 연애와 관련된 오디오파일을 우연하게 청취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정직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초반의 관계를 실패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강사는 자신의 결점이나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너무 처음부터 오픈하지 말라고. 어느정도 관계가 진전된 뒤 상대방이 그것을 감당할 정도의 여유가 생겼을 때 말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나 역시 과거에. 아니 사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 연인의 자리에 그 사람을 두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민감하거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속깊은 이야기를 터놓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야 내 자신이 오롯이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충족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나 애정이 솟게 되는 튼튼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설사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
학교 다닐 때 거의 달마다 돌아오는 행사는 글짓기나 독후감 쓰기 같은 각종 '작문'대회였다. 매달의 각종 ~의 날' 혹은 '~의 달'은 글을 쓰는 하나의 의례적인 행사였고, 학년이 거듭될수록 매번 반복되는 주제 덕분에 '과학의 달'의 글짓기나 호국보훈의 달의 '통일'처럼 특정 주제의 글을 쓸 때 갖춰야하는 구성이나 내용 역시 점점 늘어만 갔다. 나중엔 주제만 듣고도 몇 개의 레퍼토리가 기승전결로 쫙쫙 연상될 지경. 초등학교 때는 얼떨결에 상을 받은 것에 재미를 느껴서 중학교 때는 내신점수를 위해서, 고등학교 때는 입시에 도움이 되라고. 그렇게 시작한 내 작문대회 인생은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교내, 시도단위의 대회들, 대학교에서 개최한 온갖 행사들.. 일정한 주제를 정해서 써야하는 백일장 외에, ..
'염소의 맛'은 2009년 앙굴렘 만화축제 ‘올해의 발견 작가’상을 받은 작품인데, 84년생 젊은 작가라 그런지 작품 하나하나가 꽤 감각적이다. 아직 뽀얀 피부에 굉장히 여리여리하게 생긴 얼굴인데, 순간의 감정이나 그 나이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섬세한 느낌들을 만화로 잘 풀어낸 것들이 많다. 이 작품은 염소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공간. 즉 수영장과 관련된 추억을 그리고 있다. 첫사랑을 그린 작품이라, 읽다보면 같이 두근두근 거리게 하는 느낌이 드는 :) 1인칭 시점으로 소년의 눈에 들어온 수영장의 모습과 사람들을 그린 이 작품은 폴리나 때처럼 색도 종류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고 거의 수채화톤인데다가 인물들을 그린 선도 간략해서 단조로울 법도 한데, 심심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색이 고운 영화의 한컷한컷을 보는..